자본주의의 날카로운 칼날은 누구를 향하는가, '행복한 라짜로'
자본주의의 날카로운 칼날은 누구를 향하는가, '행복한 라짜로'
  • 영화부|유채린 기자
  • 승인 2019.06.25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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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글로벌스타 유채린 기자] 인류는 지구에서 살아가는 이래로 지속해서 발전해왔다. 인간 스스로의 모습을 생존에 최적화된 형태로 발전해왔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써왔다.

그 결과로 18세기 이후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은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시장 논리와 자본주의와 같은 경제학적 사고방식이 일반적인 것으로 자리 잡았으며, 이것은 인류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71회 칸영화제 각본상을 받았으며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되어 많은 호평을 받았던 알리체 로르와커 <행복란 라짜로>는 바로 이렇게 발전해온 사회에 대해, 인류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라는 의미를 던지는 영화이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진 제공=(주)슈아픽쳐스

 

이탈리아의 외딴 마을인 인비올라타에서는 50명 정도 되는 소작농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의 담배 농장에서 일하며 전기조차 제대로 쓰지 못해 전구를 돌려 쓰고, 비좁은 방에서 열댓 명이 함께 생활하기도 한다. 그들 중 한 명인 라짜로는 소작농들의 하인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작 부인은 소작농들을, 그들은 라짜로를 착취하는 구조인 것이다.

어느 날 후작 부인과 그의 아들 탄크레디가 마을을 찾아오게 되는데, 자유를 갈망하던 탄크레디는 라짜로와 함께 납치 자작극을 꾸민다. 하지만 라짜로가 열병을 앓는 사이에 상황은 급변한다. 납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은 인비올라타에서 벌어지던 소작 행위를 고발하게 되고, 이로 인해 이웃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탄크레디를 찾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진 라짜로가 깨어났을 때는 수십 년이 흐른 뒤였다. 그러나 인비올라타에 살던 주민들의 삶은 소작농일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게 된 라짜로는, 어느 날 은행에 찾아가 후작 부인의 재산을 탄크레디에게 돌려주라고 말하고, 사람들에게 맞아 죽게 된다. 

 

사진 제공=(주)슈아픽쳐스

주인공의 이름 ‘라짜로’는 성경의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나사로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한다. 나사로는 ‘하느님이 도우셨다’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써 그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자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일화에서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오빠로 병을 얻고 죽게 되지만 예수가 그를 되살린다. 그리고 다른 일화에서는 부자와 대비되는 자로 비참한 삶을 살았으나 죽은 뒤에는 천국에 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된다. 나사로와 같은 시각에 죽은 부자는 현생과는 정반대로 지옥에 갇히게 된다. 

 

하느님이 도우신 인간. 순수함 그 이상의 신성함을 지닌 라짜로의 눈은 언제나 선하게, 옅은 웃음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후작 부인의 ‘사기극’에서 벗어나 자본주의 논리로 흘러가는 세상에서 살게 된 그들은 여전히 삶의 밑바닥을 살고 있다. 심지어 과거로 돌아가기를 꿈꾸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라짜로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른다.

“나는 농부들을 착취하고 그들은 저 애를 착취해.”라는 후작 부인의 대사는 너무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근대 이후 여전히 진행 중인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을 가진 자가 곧 권력자이며,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점점 아래로 내려갈수록, 적은 것을 더 많은 이들이 가지기 위해 서로를 할퀸다. 소작농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더 아래라고 여겨지는 라짜로를 부려먹는다. 그들은 생각해주는 척, 배려하는 척하면서 라짜로를 이용하지만 라짜로는 어떠한 불평도 하지 않는다. 

 

사진 제공=(주)슈아픽쳐스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우리는 성자들이 무릇 힘과 카리스마가 있어야 하고 세상일에 간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신성함이 카리스마는 아니라고 믿는다. 오늘날 성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를 내칠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라짜로는 절대적인 선, 신성함을 뿜어내는 인물이지만 그는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못한 채 죽는다. 그리고 함께 살던 이들 역시 라짜로의 그런 모습을 알지 못했다. 이러한 감독의 말을 생각해본다면, <‘행복한’ 라짜로>라는 반어적인 제목은 극단적인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더욱 먹먹함을 준다. 

 

사회, 경제적 발전은 인류의 세계관과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고,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이 시장 경제의 논리로 굴러간다. 과연 이러한 발전은 정말 모두를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져보아야 한다. 어쩌면 ‘끊임없는 연쇄반응’으로 우리가 보지 못하는 밑바닥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이들을 자원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을까?

군주-귀족-농민으로 이어지는 계급 구조는 시민 혁명을 통해 파괴되었지만, 근본적인 피라미드 구조는 자본주의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라짜로같은 인물도 필요하지만 그를 알아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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