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 특집 #2: 최악의 하루
김종관 감독 특집 #2: 최악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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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진실의 미장센에서 서로가 빚어낸 최고의 하루

[루나글로벌스타 송승원 평론가]

이건 곤경에 처한 한 여자의 이야기'라는 료헤이의 독백으로 시작하는 영화는 연기를 하는 배우의 독백으로 이어졌다가 이를 지켜보는 은희의 시선에서 비로소 초점을 맞춘다. 배우의 독백은 이어진다. "진짜라는 게 뭘까요. 사실, 전 다 솔직했는걸요". 영화는 시선의 깊은 침전이 이뤄지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진짜'에 대해 묻는다. 그러나 이어지는 배우의 대사는 혼란을 준다. 그녀는 빈 컵에 커피를 따르는 시늉을 하며 "커피 좋아해요?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요. 당신들을 속이기 위해서는"이라고 대사를 잇는다.

 자신은 솔직했다며 진짜에 대해 묻던 배우는 이제, 가짜 시늉을 하며 '당신들'을 속이기 위해 각성을 다짐한다. 무엇이 진짜 배우의 속마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탈()진실의 미장센으로부터 <최악의 하루>는 시작된다. 그러나 영화의 제목에는 '소유격'이 배제돼있다. 영화가 대부분의 러닝타임 동안 은희의 시선을 고수한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은희의 최악의 하루로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오프닝에서 독백을 맡은 료헤이의 최악의 하루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최악의 하루를 보내는 동안 탈진실의 상황에서 방황한다.

 

최악의 하루도, 최고의 하루도 언제나 경황 없이 찾아온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최악의 하루도, 최고의 하루도 언제나 경황 없이 찾아온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거짓말(솔직하지 못함)은 두 사람을 탈진실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게끔 만든다. 자신의 출간회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에서 온 료헤이는 그의 앞을 지나가던 은희의 도움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하고 답례로 커피를 산다. 이때, 배우인 은희와 소설가인 료헤이는 자신의 직업을 '거짓말을 만드는 직업'이라고 설명한다. 솔직하지 못함으로 곤욕을 치르게 되는 두 사람이 자신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상황은 굉장히 상징적인 구석이 있어서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해서 곱씹어보게 만든다.

 영화의 후반부에 간접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료헤이의 솔직하지 못함과 달리, 은희의 솔직하지 못함은 영화의 모든 부분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은희는 료헤이와 커피를 마시는 동안에도 연인 현오에게 차가 밀려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다고 너무도 천연덕스럽게 문자를 보낸다. 그녀의 거짓말은 고백으로 곧 사실이 밝혀지는데 이는 '모든 솔직하지 못함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미장센으로도 볼 수 있다(영화가 끝날 때, 은희와 료헤이의 솔직하지 못함은 여과 없이 들통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가면을 쓴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우리는 언제나 다른 가면을 쓴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오프닝에서 배우의 독백이었던 '전 다 솔직했는걸요''당신들을 속이기 위해서는'라는 대사는 은희의 모습을 통해 병치된다. 은희는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상대방에게 진심을 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은희는 현오와 만나며 유부남인 운철과 바람을 피운 적이 있다. 이를 알고 있는 현오는 그 문제로 은희와 말다툼을 벌이는데 은희는 한 달 남짓 잠깐 만났을 뿐이며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자신을 부를 때 자신의 이름 대신 다른 여자의 이름을 부르는 그를 보며 화를 낸다.

 이는 현오와 만나고 난 직후, 갑작스럽게 성사된 운철과의 만남에서도 반복된다. 은희는 운철에게 현오와의 교제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한편으로는 아내와 재결합하기로 했다는 운철의 고백에 눈물을 흘린다. 그 사이 카페에서는 산울림의 '너의 의미'가 울려 퍼진다. 두 사람은 은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쯤 되면 은희가 보여주는 언행들 속에서 진짜와 가짜를 분간하려는 시도 자체가 허사라고 느껴진다. 은희는 그저 관계에 따라 거짓말이라는 가면을 쓸 뿐이다. 현오를 만날 때와 운철을 만날 때, 헤어스타일이 달라지는 것처럼.

 그러나 거짓말로는 거짓말을 온전히 감출 수 없다. 따라서 그녀가 해야만 하는 거짓말의 총량은 거짓말의 횟수가 거듭될수록 점차 늘어난다. 거짓말의 총량이 은희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났을 때 영화는 비로소 클라이맥스를 허락한다. 현오와 운철 앞에서 모든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은희의 거짓말은 효력을 잃는다. 은희는 주저앉고 두 사람은 떠나간다. 그러나 거짓말을 했던 건 은희만이 아니다. 현오도 운철도 거짓말을 했다. 이 관계에서 승자는 없다. 거짓말을 두른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최악의 하루를 맞이하게 됐을 뿐이다.

 

이제는 당신의 하루를 보여줄 차례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제는 당신의 하루를 보여줄 차례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료헤이에게도 이날은 최악의 하루에 가깝다. 출간회에 참석한 인원이라고는 호기심에 들려본 두 사람이 전부인 데다가 시종일관 무례하기 짝이 없었던 출판사 직원은 더 이상 출판사를 운영하게 될 수 없다며 계약 해지를 통보한다. 료헤이에게 오프닝 속 배우의 독백처럼 '신이 내 인생을 망치려고 작정한 날'이 틀림없는 가운데 그를 인터뷰한 기자의 격정적인 질문은 그의 감정에 경종을 울린다. '인물들을 위기에 넣고 꺼내주지 않는 당신은, 그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하는 당신은 정말 그 사람들을 잘 알고 있는 건가?'

 료헤이가 '그 사람들을 정말 잘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위기에 넣고 또, 불행으로 단정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기자의 질문을 통해 잘 알고 있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한 우매함을 비로소 성찰하고 반성하게 된다.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렇게 타국에서 느닷없는 깨달음을 얻게 된 료헤이는 공교롭게도 남산 중턱에서 은희를 만난다. 최악의 하루, 고통스럽지만 특별한 경험을 통해 한 걸음 더 성장한 두 사람은 영화의 엔딩을 향해 함께 걸어간다.

 (언어의 장벽 탓도 있지만) 은희는 료헤이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료헤이는 불행으로 단정 짓지 않고 해피엔딩으로 끝날 누군가의 이야기를 은희에게 들려준다. 그렇게 영화는 두 사람이 관객을 바라보면서 끝이 난다. 이제 <최악의 하루>는 은희의 것도, 료헤이의 것도 아닌 관객의 것이 된다. 타인을 속이며 나조차 나를 쉽게 알 수 없게 돼버린 하루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엔딩을 준비한다. 영화의 제목에 배제된 소유격에는 당신도 포함돼있는 셈이다. 언젠가 겪었을. 언젠가 겪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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