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강렬한 향수 ‘레토’
겪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강렬한 향수 ‘레토’
  • 송승원 평론가
  • 승인 2019.01.02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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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80년대 러시아 로큰롤의 표상 빅토르 최에게 향수를 느끼나

[루나글로벌스타 송승원 평론가]

 

2019년 1월 3일 개봉 예정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레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2019년 1월 3일 개봉 예정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레토'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관객 수가 800만 명을 넘어갈 무렵, 음악을 하는 지인과 그의 작업실에서 음악 트렌드에 대한 대화를 하던 중 지인이 말했다.

 

"말 그대로 유행은 돌고 돌아. 레트로(Retro)라 그러지. 신기한 건 당시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젊은 사람들이 과거의 유행에 열광한다는 사실이야. 보헤미안 랩소디에 20대가 이렇게 열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레토>를 보면서 지인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내가 태어나지도 않은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샌가 영화가 복원해낸 80년대에 완벽하게 동화됐다. 인물들은 내 친구들처럼 친근했고 음악들은 내 플레이리스트처럼 취향에 맞았다. 이 격의 없는 친절함은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다. 나는 그저 <레토>에 대해 내가 느끼는 향수의 근원이 궁금할 뿐이다.

 

영화의 색채 없음은 당시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사진 출처: 다음 영화]
영화의 색채 없음은 당시의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반영한다[사진 출처: 다음 영화]

 

 <레토>1980년대 레닌그라드의 한 공연장에서 시작된다. 유명 뮤지션인 마이크의 열창이 계속되고 있지만 관중석에서는 떼창도, 환호성도 나오지 않는다. 관중은 손만 까딱거릴 뿐이다. 영화는 음악 역시 통제와 검열의 대상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레토>가 흑백영화인 이유로 만들어진 이유는 이와 같은 시대상 재현의 연장선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 탁한 '색채 없음'은 통제와 검열로부터 상실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뮤지션들의 애환을 관객들에게 영화 내내 자동반사적으로 상기시킨다.

 자유로운 창작이 제한되는 억압의 시대 속에서 뮤지션들은 어떻게 자신의 음악 세계를 지켰을까. <레토>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대답이다. 그는 러시아에서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빅토르 최(1962 ~ 1990)'의 이야기를 스크린에 복원한다. 그러나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이 복원한 것은 빅토르 최의 전성기가 아니다. <레토>는 빅토르 최가 유명세를 얻기 이전의 '도약기'를 다룬 영화다. 그래서 <레토>에는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에 대한 빅토르 최의 고민이 짙게 배어있다.

 

'레토'는 빅토르 최가 '어떤 음악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음악을 했느냐'에 주목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레토'는 빅토르 최가 '어떤 음악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음악을 했느냐'에 주목한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빅토르 최는 자신의 음악관에 있어 타협을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 '장르를 바꿔보자', '키를 더 높여라'같은 조언이 그에게는 불편하다. 단순 자존심 때문은 아니리라. 빅토르 최에게 자신의 음악을 고수한다는 것의 의미는 억압의 시대에서 자기 자신만큼은 잃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 아니었을까. 타협은 항상 '일정 부분 포기'를 수반한다. 그리고 청춘은 항상 타협의 딜레마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이야말로 시대 불변의 진리일지도 모른다. 고난을 감수하고 나아갈 것이냐, 고난을 회피하고 정리할 것이냐.

 영화 속, 빅토르 최가 딱 한 번 타협을 하는 순간이 있다. 큰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고 싶어 했던 빅토르 최는 공연 담당자가 자신이 선정한 곡만으로 공연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고수하자 발끈하지만 결국에는 못 이기는 척 수락한다. <레토>는 타협 따위는 수긍하지 않는 고고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다. 재능을 가졌으나 현실의 문제 앞에 때로는 타협을 수긍해야 하는 한 청춘의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빅토르 최의 음악에는 청춘이라서 느낄 수밖에 없는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공존한다. 듣는 이를 무력하게 하면서도 복돋아준다.

 

빅토르 최의 성장은 혼자만의 성장이 될 수 없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빅토르 최의 성장은 혼자만의 성장이 될 수 없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레토>는 빅토르 최의 성장영화지만 그의 삶으로만 점철되지는 않는다. 빅토르 최의 성장통에는 다양한 뮤지션들의 삶이 얽혀있다. 밴드 '주파크'의 리더 마이크는 빅토르 최의 성공적인 도약기를 마련해준 멘토로 영화 속에서 빅토르 최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뤄진다. 빅토르 최와 마이크의 관계는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관계와 같다. 빅토르 최는 마이크에게 작곡에 대한 조언과 음반 발매 기회를 제공 받음으로써 성장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결국은 그를 부정함으로써 성공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마이크에게 빅토르 최는 '결여된 자신'과도 같았다. 그는 현실에 타협한 뮤지션이다. 록스타를 꿈꾸지만 공연 담당자의 눈 밖에 나지 않을 가사와 멜로디로 그럭저럭 관객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마이크는 너무 많은 것을 타협해버린 채 중년의 가장이 됐다. 빅토르 최와 달리, 마이크는 자신의 방식대로 억압의 시대를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빅토르 최에 대한 마이크의 전폭적인 지지는 타자를 통한 자아실현인 셈이다. 이 두 사람의 관계는 타협과 선택 그리고 성장의 결과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어떤 때는 명곡의 등장만으로도 족하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어떤 때는 명곡의 등장만으로도 족하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그러나 <레토>에 마력을 부여하는 것은 스토리가 아닌, 음악에 있다. 인물들의 고민에는 비틀즈, 롤링 스톤즈, 데이비드 보위와 같이 당시 전 세계를 풍미했던 명곡들이 함께한다. <레토>는 이와 같은 명곡들을 일반적인 배경 사운드로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선다. 뮤지컬처럼 극 중 인물들이 직접 해당 곡을 부르고 그에 맞춰 연기하도록 리메이크하는 데까지 이른다. 특히, 영화의 초반 등장한 Taking Head'Psycho Killer' 리메이크 씬이 주는 쾌감은 잊기 힘들다. 도무지 필자의 단어로는 잡아낼 수 없는 자유분방함과 에너지로 충만하다.

 뿐만 아니라 빅토르 최의 일행 중 한 명이 누군가의 상상으로 구성된 특정 씬마다 관객에게 '이건 없었던 일이야'라며 말을 건네는 연출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이러한 연출은 억압의 시대 속에서 뮤지션들이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과 이상의 경계를 관객이 자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흑백영화라는 점 때문에 영화가 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독자들에게 이 정도면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았을까. 오히려 <레토>는 일반적인 음악영화들보다 동적인 편에 속한다.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역동적인 영화의 이러한 특성은 묘한 매력을 불러일으킨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레토>에 대해 "단순하고 바뀌지 않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며, 미래의 록 아이콘들, 그들의 삶의 방식과 그들이 숨 쉬었던 공기에 보내는 송가이다"라고 말했다. 억압의 시대에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구축한 이들의 이야기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닮아있다. '어떤 음악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결국,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관통할 수밖에 없다.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답변'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레토>의 서사가 주는 이와 같은 중압감이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은 까닭은 나 역시, 그 질문에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만 하는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에 더해 내가 최근 빠져있는 레트로 장르의 오리지널이 그 자체로 존재했던 시대에서 재현되는 명곡의 향연은 내게 익숙한 특별함을 제공한다. 80년대의 러시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음에도 <레토>에 등장하는 인물들과 음악들에 강렬한 향수를 느끼는 건 <레토>가 그만큼 현재와 과거의 변곡점 사이에서 삶의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작품이라는 의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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