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다시보기 #2: 해피 투게더
왕가위 다시보기 #2: 해피 투게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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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기에는 아프고, 놓기에는 허전한 사랑의 아이러니

1997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1997년 개봉한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고전(Classic)은 오래됐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촌스럽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본질은 세월의 풍화작용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고전이 품어내는 삶에 대한 보편성은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깊어진다. 고전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다. 왕가위 감독은 90년대에 그의 필모그래피에 다시는 없을 명작들을 제작해내는데 이 시기의 작품들 중 일부는 가히 고전이라 불릴만한 가치가 있다. 오늘 소개할 영화 <해피 투게더>가 그렇다. <해피 투게더>는 왕가위 감독이 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특한 연출 기법으로 '사랑의 아이러니'를 표현한 작품이다.

 

"아휘, 다시 시작하자"

보영은 툭하면 저렇게 말했고 내게는 그 말이 먹혔다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기를 수없이 반복해온 아휘와 보영. 두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원점으로 회귀한다. 여느 날처럼 격한 헤어짐 끝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홍콩에서 아르헨티나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과거에 보영이 사온 램프에 그려진 이구아수 폭포. 그러나 여정은 두 사람의 관계처럼 순탄하지 않다. 두 사람은 고속도로 한복판에서 길을 잃는다. 설상가상으로 타고 온 차도 고장 난다. 아휘는 해결 방안을 궁리하고 보영은 아휘에게 지루하다며 투정을 부린다. 아휘는 그런 보영의 투정을 다 받아준다.

 왕가위 감독은 이처럼 영화의 도입부를 활용해 반복돼오던 두 사람의 이별에 대한 근거를 제공한다. 아휘와 보영이 헤어져야 했던 이유는 복잡하지 않다. 관계에 있어 두 사람 사이에 형성된 위계질서가 너무나도 분명한 까닭이다. 관계에서의 지분과 사랑의 크기는 반비례한다. 상처와 인내는 더 사랑하는 사람의 몫이 된다. 어떤 이별에서 아휘는 더 사랑해서 떠났을 것이고, 더 사랑해서 돌아왔을 것이다. 보영과의 관계에 있어 아휘는 더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무력하다. 왕가위 감독은 '더 사랑한' 아휘의 시선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보영은 많이 지루해했고 결국 우린 헤어졌다"라는 아휘의 나레이션이 이어지며 전환되는 플롯. 세상에는 두 종류의 헤어짐이 있다. 다시 만날 목적지가 있는 헤어짐과 다시 만날 목적지가 없는 헤어짐. 아휘와 보영은 항상 후자 같은 전자를 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홍콩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술집에서 일을 하는 아휘와 우연히 다른 사람과 함께 그 술집을 찾은 보영. 초조한 아휘와 달리 보영은 태연하다. 두 사람이 감당해야 했던 이별의 무게는 이렇게도 달랐다. 애초에 체감하는 사랑의 밀도가 같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왕가위 감독의 연출적 특징 중 하나는 이와 같은 우연적인 요소들에 의해 만남 즉, 인연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이별을 다루는데 있어서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한다는 것 역시 그의 연출적 특징이다. 이렇듯 왕가위 감독의 작품 세계에서 만남은 우연으로, 이별은 필연으로 설명된다. 보영은 그 우연을 놓치지 않는다. 아휘에게 전화를 걸어 그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찾아오게 만든다. 보영 역시 여전히 아휘를 원한다. 아휘가 보영을 원한 것만큼이 아니었을 뿐이다. 보영이 사랑했던 것은 '익숙함'이었을까, '아휘'였을까.

 술에 한껏 취해 보영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 아휘. 보영은 묻는다. 자신을 만난 것이 후회되냐고. 아휘는 화를 낸다. 안 보일 때는 괜찮았는데 지금 보니까 후회된다고. 지루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떠나놓고 그립다는 이유만으로 불쑥 자신 앞에 나타나 마음을 흔들어놓는 보영에게 화가 날 수밖에. 그러나 더 화가 나는 건 그런 보영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이었으리라. 아휘는 보영에게 화를 내는 그 순간조차도 그를 사랑했다. 감정을 추스를 수 없었던 아휘는 황급히 보영의 집을 떠난다.

 그렇게 쉽게 도망칠 수 있는 감정이었다면 이렇게 지독하도록 아프지도 않았을 것이다. 보영은 아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도 만들 수도 있었다. 아휘는 종종 행복했고 자주 불행했다. 이해타산적으로 따지면 불합리한 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휘가 항상 보영과 함께한 이유는 그 불합리함의 총량보다 보영에 대한 사랑의 총량이 언제나 압도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휘는 이번에도 보영이 돌아올 수 있는 빈자리를 내어줄까?

 

무채색의 일상은 사랑하는 사람의 등장만으로 색을 되찾는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무채색의 일상은 사랑하는 사람의 등장만으로 색을 되찾는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아휘와 보영이 그렇게 말다툼을 벌이고 난 후 며칠 뒤, 보영이 누군가와의 주먹다짐으로 심하게 상처를 입고 아휘를 찾아온다. 아휘는 그런 보영을 말없이 꼭 안아준다. 병원에서 아휘가 다친 보영 옆에 아무 말 없이 앉아 있는 씬에서 두 사람이 함께 택시를 타고 아휘의 집으로 돌아오는 씬으로 전한될 때, 이전까지 흑백이었던 영화는 컬러로 바뀐다. 왕가위 감독은 별도의 연출 없이 색의 전환만으로 아휘의 속마음을 드러낸다. 보영과 함께하고 나서야 아휘의 빛바랜 삶은 색을 되찾는다. 보영도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아휘와 보영의 관계에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단 하나다. 함께일 때 두 사람은 행복하다(Happy Together).

 왕가위 감독은 아휘와 보영이 다시 함께 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화에서 제공되지 않은 두 사람의 과거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한편,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손도 심하게 다친 아휘는 먹는 것부터 씻는 것까지 모든 것을 아휘에게 요구하고 아휘는 귀찮아하면서도 보영의 모든 요구사항을 들어준다. 그렇게 두 사람은 끊임없이 티격태격 부딪치며 시간을 보낸다. 아니, 사랑을 한다. 그것이 그들이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보영은 아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고 아이처럼 투정부림으로써 아휘를 사랑했고, 아휘는 철없는 보영을 챙겨주고 감싸 안아줌으로써 보영을 사랑했다.

 

보영에게 말 안 했지만 그가 빨리 낫는 게 싫었다. 그가 아플 때가 가장 행복했으니까

 

 사랑을 느끼는 온도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아휘와 보영의 온도차는 너무 컸다. 아휘는 보영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만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보영은 아휘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을 때는 훌쩍 그를 떠나곤 했다. 아휘는 보영을 사랑해서 만났고, 보영은 아휘를 필요해서 만났다. 지향하는 사랑의 형태가 달랐기에 두 사람의 관계는 항상 한계에 직면했다. 아휘와 보영이 집안에서 춤을 추는 씬에서 보영은 아휘에게 '항상 거기서 틀려'라며 핀잔을 준다. 그러면 아휘는 홀로 그 동작을 연습하고 보영은 한참 후에야 아휘와 다시 춤을 춰준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그들은 항상 같은 지점에서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하려하지 않았다.

 지탱되기 어려운 사랑에서 오는 행복은 잠시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사랑에 대해 의심을 품는다. 아휘는 자신이 일을 하러 간 사이에 보영이 밖에 나가서 누군가와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영은 아휘가 일하는 곳의 동료와 관계를 맺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대방에 대한 의심은 불안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기정사실화된다. 아휘는 보영의 의심이 오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해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보영을 자극한다. 보영도 아휘가 초조해하도록 말을 보탠다. 어느 날 보영은 보란 듯이 밤늦게 돌아와 자신을 기다리는 아휘에게 담배를 사 왔을 뿐이라며 질문을 일축시킨다. 두 사람에게는 이제 사랑해야하는 이유가 아닌, 원망해야하는 이유만이 남았다.

 아휘는 다음날 담배를 보루째로 사와 보영이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를 내며 탁자에 내려놓는다. 아휘는 보영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보영에게 '아직은 너를 믿고 싶어'라고 기회를 준 것일 수도 있고 '정말 누군가를 만났을지라도 모르는 척해 줄 테니 지금이라도 다시 함께하자'라고 애원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 세상에는 자신은 끝까지 알 수 없는 진실이 존재한다. 아휘는 끝내 그날의 진실이 무엇인지 몰랐다. 아휘에게는 그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증명되지 않은 진실은 의심뿐만 아니라 착각에 대한 여지도 남기니까. 아휘는 의심을 할 수도 있고, 착각을 할 수도 있다. 선택은 아휘의 몫이다.

 

아휘와 보영처럼 숱한 노력에도 극복될 수 없는 관계도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아휘와 보영처럼 숱한 노력에도 극복될 수 없는 관계도 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결국, 보영은 떠났고 아휘는 남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알았다. 지금의 헤어짐은 다시 만날 목적지가 없는 헤어짐이라는 것을. 두 사람의 관계는 우연으로 다시 묶이는 것조차 불가능할 만큼 망가졌다. 아휘는 방황한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보기도 하지만 텅 빈 집에 돌아왔을 때의 공허함만 짙어질 뿐이다. 도축장에서 새로운 일거리도 구해봤지만 변한 것은 없다. 아휘가 도축장 바닥에 가득 고여 있는 핏물을 호스로 물을 뿌리며 배수구로 치우는 씬에서 핏물은 잠시 갈라지기만 할 뿐 이내 바닥을 다시 덮는다. 보영을 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휘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홍콩으로 돌아갈 경비를 다 모은 아휘는 아르헨티나를 떠나기 전,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떠난다. 왕가위 감독은 아휘가 이구아수 폭포를 보러 가는 씬과 보영이 아휘의 흔적이 새겨진 곳들을 찾아 해매며 그를 그리워하는 씬을 교차시켰다. 이제는 보영의 차례다. 아휘는 떠났고 보영은 남았다. 보영은 아휘가 자신 때문에 겪어야 했던 고독과 상처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아휘의 이불을 끌어안고 오열하는 보영의 모습은 애절하다 못해 처절하다. 장국영은 어떤 감정을 담아냈기에 그렇게 절절한 표정으로 연기를 할 수 있었을까. 왕가위 감독의 전작 <아비정전>(1990 )에서도 그렇지만 장국영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더 애잔하게 만든다.

 결국, 두 사람의 목표였던 이구아수 폭포에 도착한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이구아수 폭포는 아휘와 보영이 함께 도달하고자 했던 이상향이었지만 함께는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이상향이었다. 아휘와 보영에게 주어진 '함께'라는 전제는 순간의 행복을 제공했으나 이를 위해 두 사람은 의심과 원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春光乍洩). 구름 사이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봄 햇살이라는 뜻이다. 아휘와 보영에게 행복은 봄 햇살에 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상처를 감수하면서까지 다시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이유는 봄 햇살이면 충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에게 세상은 그 찰나의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

 

이구아수 폭포는 새 출발을 위한 여정이 아닌 그들의 결말이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이구아수 폭포는 새 출발을 위한 여정이 아닌 그들의 결말이었다 [사진 출처: 다음 영화]

 

 어떠한 가정법이 붙어도 '그럼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관계가 있다. 아휘와 보영의 관계가 그랬다. 그날 보영이 밤늦게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아니, 처음으로 돌아가 그날 보영이 고속도로에서 아휘를 떠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이야기는 다르게 써졌을까. 아르헨티나는 홍콩의 지구 반대편에 위치한 곳. 두 사람은 지구 정반대로 떠났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때의 우리가 더 어렸었다면' 혹은 '그때의 우리가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하는 식의 가정은 애초부터 무의미한 것이었다. 왕가위 감독은 처음부터 아휘와 보영은 그럼에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관계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품기에는 아프고 놓기에는 허전한 사랑의 아이러니 속에서 아휘와 보영이 내린 선택은 상대방을 그리고 자신을 놓아주는 것이었다. 선택에 따른 지독한 아픔 역시 알고 있었을 테지만 더 이상의 욕심은 서로를 더 심하게 상처 입힐 뿐이다. 무엇이 옳은 선택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왕가위 감독은 아휘와 보영의 세밀한 감정선을 역설적으로 툭툭 끊기는 연출 기법과 부자연스러운 카메라 쇼트로 표현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이에게 쉽게 잊히지 않을 진한 여운을 선사한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가슴 한편에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기에. <해피 투게더>는 그렇게 우리에게 봄 햇살처럼 강렬하게 기억된다.

 사랑을 다룬 영화는 많다. 이별을 다룬 영화도 많다. <해피 투게더> 역시 그 보편적인 범주에 속해 있으나 영화의 화법은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 거치면서도 섬세하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에서 으레 등장하는 우수에 찬 독백과 서정적 대사는 어김없이 등장하며 보는 이를 그의 작품 세계로 흡입시킨다. 고여 있으나 결코 썩지 않는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이 고전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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