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리뷰] '1922' - 20년대 미국의 양면성과 같은 살인고백
[L리뷰] '1922' - 20년대 미국의 양면성과 같은 살인고백
  • 김준모 기자
  • 승인 2018.02.12 21: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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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원작의 넷플릭스 영화

[루나글로벌스타 김준모]

 

 

1920년대의 미국은 동전과 같은 양면성을 지닌 시대였다. 1차 대전 후 미국은 호황기를 누리게 된다. 그들 역시 참전으로 많은 물적, 인적 피해를 보았으나 그 회복에 있어 속도가 빨랐고 국토가 황폐화되어 복구로 인한 문제를 겪은 유럽과 비교할 때 눈에 띄는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다. 반면 이 시기 미국은 금주령을 내린다. 표면적인 이유는 1차 대전 당시 필요한 곡류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그 이면에는 급격한 도시화에 거부감이 있던 농민들, 기독교 근본주의자, 노동자들의 음주로 인한 생산성 하락을 걱정하던 자본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금주령을 계기로 알 카포네와 같은 밀주업을 일삼은 갱단이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자본주의의 영광을 입은 경제적인 호황기가 지속되고 있는 미국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금주령과 같은 복잡한 이해관계, 그리고 생산력을 구매력이 따라잡지 못하게 만드는 급격한 빈부격차가 숨어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벌을 받기라도 하듯 1929년, 영원할 줄 알았던 경제호황은 대공황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스티븐 킹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1922>는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공포스릴러다. 윌프레드는 장인이 죽으면서 막대한 규모의 토지를 상속받는다. 그 땅에서 농부로 살아갈 계획을 세우는 윌프레드와 달리 아내 아를레트는 땅을 다 팔고 도시로 갈 계획을 세운다. 어차피 땅은 아내의 것이기에 윌프레드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허나 그는 이 농촌에 남고 싶다. 그는 아내를 설득하지만 듣지 않는다. 윌프레드는 자신들이 가진 땅을 돈으로 환산할 시, 도시에서 형편없는 삶을 보낼 거라 생각한다. 그는 그런 삶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그리고 아들 헨리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을 지니고 있다. 윌프레드와 헨리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다. 20년대의 경제호황을 내버려두고 그들은 농촌에 정착하길 원한다. 반면 아를레트는 그 경제 호황기 속에서 돈의 가치를 알아보고 그 중심부로 들어가려는 인물이다.

급격한 도시화에 거부감을 느낀 농부들이 금주령에 찬성, 노동자들에게 잠깐의 즐거움마저 앗아간 거처럼 농부 윌프레드는 이 넓은 땅에 아들과 함께 남기 위해 아내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헨리 역시 이웃집에 좋아하는 소녀인 샤넌과 함께 있고 싶다는 욕망을 숨기지 못한 채 이 계획에 동참한다. 작품은 아내를 죽이는 남편의 심리를 시대적 상황에 빗대기 위해 그의 성적을 조정한다. 그 힌트가 할란이 윌프레드의 집을 찾아왔을 때이다. 이 장면에서 윌프레드는 할란의 큰 집과 넓은 농토, 집 안까지 이어진 수도, 순종적인 아내를 그에게 느끼는 질투와 열등감이라 말한다. 20년대는 승전의 시대이기도 했다. 미국은 상원의 인준 거부로 국제연맹에 가입하지는 못했지만 1차 대전의 승전국이었고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당시 미국의 아버지들은 승리의 세대였으며 그들의 자부심은 하늘을 찌르던 시기였다.

 

이를 증명하듯 할란에게는 부가 있고 힘이 있으며 자신을 믿고 따라주는 가족이 있다. 반면 윌프레드에게는 무엇이 있는가. 땅은 그의 것이 아니며 아내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가부장적이고 고압적인 ‘승자’의 기분을 내고 싶은 20년대의 아버지는 자신의 현실에 좌절을 겪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해버린다. 아내의 죽음 이후 등장하는 소재는 쥐이다. 쥐는 빈곤과 가난을 상징한다. 유럽의 뒷골목에나 있을 법한 더러운 동물이 쥐이다. 이 쥐는 아내의 시체를 돌아다니며 파이프를 타고 나타나 소의 젖을 잘라버린다. 아내의 죽음은 자본의 상실을 의미한다. 아내를 죽이고 땅을 차지하므로 윌프레드는 돈을 포기했고 이는 아이러니한 결과를 가져온다. 돈이 ‘필요한’ 상황이 닥친 것이다.

 

이 지점에서 영화는 윌프레드가 닥친 상황을 아이러니하게 묘사한다. 할란은 그에게 75달러를 줄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그 돈이 없어 고심한다. 그리고 아들과 갈등을 겪는다. 돈의 소중함을 알게 된 아들은 땅을 팔지 않은 아버지를 원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할란은 35달러를 빌리기 위해 은행을 향한다. 그리고 은행은 어처구니없다는 식으로 그를 대한다. 그 넓은 땅을 지니고 있으면서 겨우 35달러를 대출해달라고? 세상에 넘치는 게 돈인데 당신 장난하는 거야? 작품의 모순은 이 지점에서 드러난다. 윌프레드는 ‘누구보다 많은 부’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부를 ‘나누지’ 않았기에 빈곤이라는 늪에 빠지고 말았다. 상위층에게만 자본이 몰려 돈의 흐름이 막혀 터져버린 대공황처럼 말이다.

 

 

앞서 영화는 윌프레드를 자본주의의 흐름에 편승하지 못한 채 그들에게 반감을 표하는 농민층으로 묘사하였다. 그리고 그의 살인이 향하는 방향이 도시의 부유계층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아를레트는 재산을 소유하고만 있을 뿐 그 재산을 통해 욕망을 채우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재산을 빼앗겼다. 그리고 그 거대한 농장을 끝까지 소유하게 된 건 결국 윌프레드다. 점점 벽을 파고 나오려 애쓰는 쥐의 모습은 다가올 불안을 상징한다. 부는 몰리고 팽창한다. 그런데 순환을 시켜줄 계층에게는 돈이 없다. 빈곤이라는 절망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그 순간을 잔인할 만큼 생생하게 포착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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