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s 무비] 한국사회의 그림자를 다룬 영화 10편
[L's 무비] 한국사회의 그림자를 다룬 영화 10편
  • 김준모 기자
  • 승인 2018.02.08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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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통해 알아보는 한국사회의 문제점

[루나글로벌스타 김준모]

어느 국가나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강대국인 미국은 총기문제, 의료보험 문제, 인종차별 등의 그림자를 지니고 있으며, 높은 국민성으로 칭찬받는 이웃국가 일본 역시 지나친 전체주의적 성향과 이로 인한 이중성이라는 어둠을 지니고 있다. 선진국가로 가느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건 저런 어둠을 숨기느냐 아니면 사회적인 공론으로 만들어 해결책을 제시하느냐 라고 생각한다. 중국이 뛰어난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나 선진국이라 불리기 힘든 이유, 그건 시민의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규제라고 생각한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한국은 5.18을 다룬 <택시운전사>를 만들 수 있지만 중국은 천안문 사태를 다룬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문화는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비추고 이를 많은 이들에게 주목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다룬 10편의 영화를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내가 왜 도망쳐야 하죠? <한공주>

 

1973년 대구 고등법원 형사부 판사들은 17세 소년이 짝사랑하던 17세 소녀를 꾀어내 강간, 기소되자 ‘기왕 버린 몸이니 오히려 짝지어 주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양가 부모를 설득, 법정에서 약혼을 치르게 만들었다. 1998년, 약 20년 전에도 비슷한 판결이 있었다. 지나가던 여고생을 승용차에 태워 강간한 23세 남성이 1심에서는 실형을 받았으나 ‘양가 부모가 두 사람을 성혼시키기로 했으니 합의 바란다’는 탄원서로 2심에서는 집행유예로 석방을 받았다. 한국의 ‘성폭행’에 대한 인식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낮았다. 피해자와 가해자를 같은 차에 태워 경찰이 연행하는가 하면 데이트 폭력은 사랑싸움으로만 여겼다. 연인과 부부 사이의 강간? 사랑하는데 무슨 강간이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한공주>는 그 유명한 밀양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만큼 한국의 성폭행에 대한 낮은 인식, 그리고 잘못된 합의문화를 큰 자극 없이 잘 보여주는 작품도 드물다. 심지어 이 영화가 가진 잔혹함은 실제 사건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영화는 17살의 어린 소녀, 한공주에게 초점을 둔다. 까칠하고 사교성 없는, 하지만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공주는 깊은 어둠을 지니고 있다. 영화는 그 어둠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대체 공주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궁금증은 정말 알고 싶지 않은 궁금증이다. 왜냐하면 공주는 ‘몰라야 되는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공주의 재능에 반하고 그녀의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 하지만 이 하나의 영상이 공주가 그나마 유지하던 ‘삶’을 무너뜨린다. 밀양 성폭행 사건 당시 경찰들은 피해 여성들에게 ‘밀양 물을 다 흐려 놨다’며 폭언을 퍼부었다. 지역 유착 때문인지 가해자들이 오히려 피해자들을 협박한 것은 물론 경찰들은 이를 방치했다. 아니, 오히려 피해자들을 압박하고 여경에게 수사 받고 싶다는 부탁조차 거절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른’이라는 이름을 지닌 부끄러운 작자들은 어린 소녀들에게 압박을 가했다. ‘자신들’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말이다. 

난 이 영화의 결말부에 마음으로 기도했다. 제발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않기를. 교실 밖의 학부모들을 보고 끔찍이 바랐다. 그런데 그 역겨운 일이 일어났다. 실제 사건에서처럼 가해자의 부모들은 공주를 찾아와 합의를 종용한다. 공주는 그 아픈 과거 때문에 도망쳤으나 다시 이들에게 붙잡힌 것이다. 왜 잘못한 사람이 도망쳐야 되는 걸까? 왜 가해자가 큰 소리 내며 ‘나쁜 놈이 더 잘 살게’ 만드는 걸까? 난 한국 페미니즘 운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국 페미니즘이 맨 처음 해야 될 일은 남성들의 강압적인 폭력, 성적 결정권을 막는 ‘성범죄’에 피해를 입은 ‘같은 여성’에 대한 온정, 그리고 보호의 손길을 보내야 한다. 피해 여성들이 합의를 볼 수밖에 없는 건 사회적인 시선과 가해자들의 폭력, 그리고 지원적인 문제다. 

왜 피해자들이 숨고 도망쳐야 하는 세상이 지속되어야 하나. 숨고 뉘우치며 고통을 겪어야 되는 건 가해자들이다. 한국은 사법구조부터 여성에게 불리한 판결과 대처를 반복해 왔고 이는 끔찍한 성폭행 사건의 반복을 낳았다. 최근에는 미성년임을 악용한 범죄들이 판을 치고 있다. 성범죄에 있어서도 자신들이 미성년임을 이용, 성범죄를 자행한다. 여성의 인권신장은 가장 낮은 곳의 존재에게 벌리는 온정의 손길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피해자’들이 숨고 고통을 겪는 또 다른 ‘공주’가 나와서는 안 된다.

                                                                                                          

 

난 그저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요즘 젊은 것들은 노력을 안 해, 노력을!’ 요즘 꼰대들에게 들으면 참 짜증나는 말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작가님처럼 유명한 작가가 되고 싶은데 어찌해야 되나요?’ 라고 물어보는 청춘들에게 이리 답한다고 한다. ‘글쎄요, 그건 좀 힘들 거 같아요.’ 자기 재능이 특별하다 여기는 건가? 좀 거만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김영하 작가는 이렇게 답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내가 작가를 꿈꾸던 시대에는 대학을 나오면 쉽게 취업이 가능했다. 그래서 작가를 준비하면서 ‘이거 안 되면 취업이나 하지, 뭐.’라는 생각에 부담 없이 글을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당시에는 작가지망생이 그리 많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 신춘문예의 경쟁률은 1300대1이라고 한다. 또 생업을 걱정하며 아르바이트 등 노동에 매진하는 젊은이들이 많기에 좋은 글이 나오기 힘들다. 좋은 글은 시간적, 심적 여유에서 온다. 이런 여유가 없는 젊은이들에게서 ‘좋은 글’이 나오기란 참으로 힘들다.

요즘은 대학을 나와도 취업이 힘들다. 또 온갖 자격증을 딴다고 해도 취업이 보장되지 않는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들인 시간과 노력에 비해 그에 합당한 직장을 얻기란 너무나 힘들다. 중소기업은 복지부터 개판이며 노동법을 어기는 걸 당연하게 여긴다. 또 대기업은 비정규직과 인턴 제도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소수의 정규직조차 언제 해고당할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아니, 난 진짜 열심히 살았는데 왜 세상은 날 받아들이지 않는 거지? 난 왜 이렇게 힘든 거지?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정말 못 사는’ 앨리스의 모습을 통해 웃픈 현실을 조명한다. 

                                                                                                         

 

자격증만 14개. 수남은 학창시절부터 ‘천재’였다. 단 하나, 컴퓨터를 빼고. 그녀의 집안은 가난했고 자연스럽게 컴퓨터를 접할 환경이 되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학교를 다닐 당시에는 학교에서 필수적으로 컴퓨터를 가르치지도 않았다. 그런데 직장에는 다 컴퓨터가 있는 걸? 결국 그녀는 지방 공장에 장부 정리 일을 맡는다. 사랑하는 남편을 만나나 남편은 귀에 문제가 있다. 시끄러운 공장에서 일하다 보니 청력이 나빠진 것이다. 병원에서는 그녀를 속여먹는다. 이상한 보청기를 남편에게 끼게 하고 남편은 보청기의 오작동으로 작업 중 실수, 손가락이 잘린다. 수남은 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잊어버린 나머지 접합 수술 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때부터 가난의 늪에 빠진 두 사람.

수남은 하루 종일 일한다. 청소도 하고, 전단지도 돌린다. 하는 일마다 끝내주게 잘한다. 그런데 그게 다다. 가장 중요한 컴퓨터로 대표되는 ‘고등 교육’을 받지 못한 나머지 하층민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또 슬픈 점은 수남이 살인을 저지르는 대상들이다. 그녀는 아파트 재개발과 관련된 사건에 휘말리며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살인을 저지르는데 그녀가 죽이는 대상들 역시 그녀와 같은 하층민들이라는 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당시 영국 사회에 대한 풍자를 담고 있다면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앨리스가 대한민국에 떨어지면 이렇게 x 같이 살지 않을까?’라는 뼈아픈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열심히 살아도 그 보답을 받을 수 없는 사회의 구조라면 누가 열심히 살려고 애를 쓸까? 전 세계적으로 불고 있는 YOLO 열풍에 대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감히 우리의 권위에 도전해? <부러진 화살>

 

생각해 보자. 국회, 아무리 국회의원들이 개판이고 선거 후 입을 싹 씻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 위해 애를 쓴다지만 어찌되었건 그들을 뽑는 건 국민의 손이다. 국회의원들은 국민이 다시 뽑아주지 않으면 4년 후 임기가 만료되며 모든 특권은 사라진다. 그래서 좋거나 싫거나 국민들의 눈치를 봐야 된다. 행정부,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5년 동안 수장이 되는 곳이다. 그 어떤 곳보다 국민의 눈치를 많이 보며 나라에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욕을 먹기에 정신 바짝 차려야 되는 게 행정부다. 그런데 법원, 여긴 국민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삼권 중 법원은 가장 중요한 곳이다. ‘처벌’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판사란 인간들은 물론 검사들까지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열심히 공부해 이 자리에 오른 사람들인데 너희 같은 질 떨어지는 인간들이랑 어울려야 해? 딱 이런 고자세다.

최근 5년간(2017년 5월 기준) 전국 판사 상대 진정.청원 현황을 보면 74건이 있었고 이 중 2017년에만 10건이 있었다. 또 한때 판사들의 막말이 뉴스를 장식했는데 증인에게 늙으면 죽어야 된다는 둥, 여자가 왜 이리 말이 많냐는 둥 고압적인 자세로 국민들에게 ‘개소리’를 하며 욕을 먹었다. 여기에 최근 국정농단 사태에서 구속수사가 필요한 인물들에 대해 몇몇 판사들이 지속적으로 구속영장을 기각하며 ‘적폐판사’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또 지나친 재벌 감싸기와 제 식구 감싸기는 사법부의 권위를 스스로 실추시키는 추태이기도 하다.

                                                                                                      

 

<부러진 화살>은 ‘석궁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대학교수 김경호는 대학 입시시험에 출제된 수학문제의 오류를 지적했다가 부당하게 해고당한다. 이에 대한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하고 항소는 이유 없이 기각된다. 한 마디로 ‘판사 꼴리는 데로’ 식의 판결이 나온 것이다. 일반인도 아니고 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김 교수이니 이런 판결에 화가 단단히 났을 것이다. ‘아니, 내가 다 아는데 어디서 수작이야?’ 그는 분노에 차 판사에게 ‘똑바로 해!’라고 협박할 생각으로 석궁을 들고 그의 집을 향한다. 그런데 판사가 배에 석궁을 맞았다고 그를 고소한 것. ‘어디서 한낱 대학교수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 집단 중 하나인 판사에게 대들어?’ 김 교수의 재판은 사법부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당장 사과해도 부족해 보이는데 김교수, 오히려 당당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난 쏜 적 없습니다!’ 알고 보니 이 사건, 증거란 증거는 다 조작된 것이다. 피 묻은 와이셔츠? 대충 조작하려다 보니 다 들통 났다. 그런데 재판은? 김교수에게 불리하게 진행된다. 증거도 받지 않고, 발언도 못하게 하고, 판사는 자기 마음대로 재판을 진행하고, 뭐 이딴 게 다 있어? 웃기게도 할 말은 사법부가 더 많아 보인다. ‘뭐 이딴 녀석이 다 있어? 감히 어디서 우리 판사를 건드려 놓고 살아 나가길 바래? 콩밥이나 쳐 먹어라!’ 권위의 가장 큰 힘은 무소불위의 권력에서 나온다. 특히 판사들의 경우 전관예우라고 판사직을 끝내고도 변호사직을 할 수 있기에 정계 혹은 정치권에 연줄을 대는 경우가 있다. 고인 물은 결국 썩기 마련이다. 사법부의 물은 고여도 너무 고였다. 

                                                                                                     

 

용서는 내가 하는 것 <오늘>

 

‘이제 그만 하죠?’ 가끔 다툼이 생길 때 문제의 원인을 제공한 놈이 저런 말을 할 때면 헛웃음이 나온다. 간혹 가다 이런 놈도 있다. ‘손뼉도 서로 맞아야 소리가 나는 건데 나도 그쪽도 다 잘못했으니까 우리가 싸운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끝냅시다.’ 끝내는 건 피해자지 가해자가 아니다. 잘못한 놈이 죗값을 치러야만 모든 일이 마무리되는 것이다. 헌데 우리나라는 이런 ‘악인’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한국드라마 중에서 제대로 된 ‘복수’를 하는 드라마가 있던가? 온갖 악행을 반복하는 악역은 뒤에 가서 ‘나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고요!’라고 호소하고 이에 마음이 움직인 주인공은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 상대를 용서한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그 흐름에 빠져 자연스럽게 여태까지 먹었던 고구마들을 소화시킨다.

우리 사회에는 ‘용서’를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특히 기독교의 경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한 모든 이들을 용서한 예수의 사랑을 본받고자, 예수가 흘린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거처럼 인간 역시 인간의 죄를 용서할 줄 알아야 된다고 말한다. 참으로 거만하고 교만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예수는 신의 아들이다. 신의 아들이기에 할 수 있었던 그 ‘위대한 사랑’을 어찌 인간에게 강요한단 말인가. <오늘>은 자신의 생일 날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로 잃은 다큐멘터리 PD 다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다혜 역시 <밀양>의 신애처럼 종교에 의해 용서를 알게 되고 오토바이 뺑소니를 친 가해자 학생을 선처한다.

                                                                                                             

 

하지만 그 아이가 소년원에서 출소 후 다시 사고를 쳤다는 소식에 다혜는 고통에 빠진다. 용서라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찍고 있었던 그녀에게 ‘용서’의 의미는 다르게 다가온다. 과연 ‘용서’라는 것이 모든 상황을 끝낼 수 있는 아름다운 선택일까? 어쩌면 용서란 죗값을 치루기 싫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기적인 단어가 아닐까? 다혜는 말한다. 만약 그때 주변에서 용서를 말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용서를 하지 않았을 거라고. 신애가 용서를 결심하고 자신의 아들을 납치, 살해한 도섭을 찾아갔을 때, 그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게 용서를 받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느꼈을 그 좌절과 고통을 다혜는 똑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때 그 애를 용서하지 않았다면 남자친구 상우와 같은 ‘피해자’가 또 나오지 않지 않았을까? 

한국 사회에도 이런 용서를 강요하는 사람들이 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피해를 입은 광주 시민에게 이제 그만 지역감정에서 벗어나라 말하는 사람들, 청춘은 물론 인생을 찢긴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외교적인 관계를 위해 이제 그만 하라는 사람들, 나라를 좀 먹은 건 물론 독재를 꿈꾸었던 국정농단 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세워진 정부에게 이건 보복일 뿐이라며 그만 하라는 사람들. 왜 잘못을 한 사람들이 ‘용서하라’ 강요하는 걸까? 왜 고통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안다 지껄이면서 ‘용서하라’ 압박하는 걸까? 용서는 ‘남’이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는 것이다.

                                                                                                        

 

어리면 죄도 어린 건가요? <돈 크라이 마미>

 

‘소년법’은 어느 나라나 뜨거운 감자다. 성인이라면 살인, 강간, 약물 등에 대해 높은 형량을 받으나 소년은 소년법의 보호를 받아 낮은 형량 속은 소년원에 수감된다. 멕시코의 경우 이런 법을 악용, 소년들에게 청부살인을 시킨다. 특히 2013년, 일명 ‘엘 폰치스’라고 불리는 미성년자 살인청부업자 루고가 붙잡혔는데 그는 11살 때 납치돼 살인청부업자로 악명을 떨치게 된다. 이런 그에게 주어진 법정 최고형은 3년, 미성년자가 ‘살인’으로 받을 수 있는 최고 형량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최근 미성년자들의 연이은 사건 사고로 시끄럽다. 차마 글에 다 쓸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고 이들이 소년법에 보호를 받아 낮은 형량이 내려질 거라는 사실에 사람들은 분노했다. 지금 소년법 폐지 혹은 수정에 대한 청원, 그리고 논의가 진행 중이다.

소년법의 원래 목적은 ‘건전한 소년을 기르자’에 기초한다. 형벌의 경우 그 기준을 처벌, 차단, 교화 중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진다. 소년법의 경우 아직 어린 소년들이기에 제대로 된 사회화 과정을 통해 다시 세상에 나와 섞일 수 있다 판단하는 교화의 과정에 기초를 둔다. 소년원의 경우 강한 처벌과 차단을 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좀 더 많은 것을 접하고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기관에 가깝다. 그래서 사람들은 분노한다. 시대가 달라졌다. 스마트폰을 통해 학생들은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경우에도 자신들이 어떤 형벌을 받을 지에 대해 알기에 교묘하게 나이를 이용,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 인신매매는 물론 납치, 살인, 강간 등 온갖 범죄를 자행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나면서 소년법의 논란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돈 크라이 마미>는 청소년 성범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이 작품의 경우 피해 여성이 당한 심리적인 고통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잔악한 청소년들의 행태를 보여주며 ‘소년법이라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이혼 후 새 삶을 준비하던 싱글맘 유림은 딸 은아가 학교 남학생들로부터 끔찍한 성폭행을 당하자 충격을 받는다. 이 사실만 해도 충격인데 가해 학생들이 미성년자라 처벌이 힘들다는 말에 그녀는 주저앉는다. 범죄자를 구속시키는 건 그 범죄자가 피해자를 협박 및 회유, 2차 폭력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구속당하지 않은 미성년자들은 은아를 협박, 다시 불러내 또 강간하고 비디오를 찍는다. 결국 이 끝나지 않을 굴레에 빠진 은아는 자살을 택한다. 

법은 자력구제를 원칙상 허용하지 않고 정당방위의 범위를 굉장히 좁게 정한 만큼 국민들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를 지키지 않고 피해자를 방치하고 범죄 사실을 방조한다면 이는 국민들에게 ‘너희가 알아서 너희를 지켜라’라고 말하는 꼴이다. 유림은 딸을 자살로 내몬 녀석들을 처벌하기 위해 애를 쓰나 법적으로 그녀가 할 건 아무것도 없다. 담당형사 역시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숙일 뿐이다. 그는 어떻게든 유림을 도와주고 싶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날뛰는 미성년자들에게 폭력이라도 가했다간 형사인 자기도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은 발전하는 인류를 향한 숙제라고 본다. 세상은 달라지고 속도는 빨라지는데 법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고 있다. 소년들은 자신이 받을 형벌에 대해 잘 알고 이를 악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심지어 이런 소년들을 이용, 범죄를 저지르는 어른들도 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미성년자 혹은 청소년 범죄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 대한 제대로 된 구속이 이뤄지지 않으니 피해자들이 2차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다. 이는 굉장히 심각한 문제임에도 불구 방치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교화’를 이야기하려면 사람을 변화시켜야 한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데 교화를 외쳐봐야 무슨 공감을 얻겠는가. 변화는 두려움에서 온다. 아이들에게 잔혹한 동화를 들려주는 건 그 잔혹함에 공포를 느껴 잘못된 행동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다. 공포를 느끼지 못하는 형벌로 교화라는 변화를 유도한다? 그건 피해자의 마음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남성들의 왜곡된 남성성 <용서받지 못한 자>

 

‘야, 남자라면 군대 당연히 가야지!’를 입버릇처럼 말했던 선배가 있다. 이 선배랑 좀 친해진 뒤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갑자기 말이 달라졌다. ‘군대 뺄 수 있으면 빼. 가봐야 뭐가 좋니? 고생만 더럽게 하고 시간만 버리지.’ 신입생 때 선배가 그토록 강조하던 ‘남성성’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군대’만큼 딜레마에 빠지는 곳도 없을 것이다. 괴롭고 힘들고 부조리한 건 알지만 막상 군대의 변화와 자정에는 목을 놓아 반대를 외치는 곳, 그곳이 군대다.

<용서받지 못한 자>는 감독 윤종빈이 국방부에 협조를 구할 때 가짜 시나리오를 제출할 만큼 노골적으로 군대에 대해 다룬 작품이다. 한국 남성들은 군대에서 집단적 마초주의에 빠져든다. 철저한 상명하복을 지켜야 하며 폭력과 폭언은 참고 인내해야 될 쓴 열매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끔찍한 순환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뤄지는 곳이 군대다. 헌데 한국 남성들은 제대 후 이 군대의 문제에 대해 망각하거나 자기가 좋은 쪽으로 해석한다. 무용담처럼 군대 이야기를 늘어놓고 군 개혁에 대해 ‘네가 군대에 대해 전혀 몰라서 그래’라며 부당한 대우를 이겨낸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훈장을 앗아가는 걸 강렬하게 반대한다. 윤종빈 감독은 이런 잘못된 군대를 경험한 한국 남성들이 보여주는 왜곡된 남성성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시작이 되는 영화가 <용서받지 못한 자>이다.

                                                                                                  

 

예전에 멘토였던 선배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군대는 정말 공평한 집단이야. 학력, 재산 뭐 그딴 거 하나도 안 봐. 오직 계급만 보니까 얼마나 공평한 집단이야?’ 그 공평함 속에 입대한 승영은 명문대생이다. 그에게 군대 내의 군기문화는 명백한 폭력이자 잘못이다. 하지만 혼자 이에 반항하는 승영에게 주어지는 건 멸시와 따돌림, 그리고 육체적인 고통이다. 정말 공평한 집단이라 똑같이 폭력을 당하고 권위에 복종하길 강요당한다. 승영은 어떻게든 군대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나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동창 태정마저 그에게 등을 지자 승영은 마음을 고쳐먹는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서 나가야지, 이렇게 계속 살 순 없잖아?’ 

지켜주던 동창은 곧 제대를 하고 그는 혼자가 된다. 이제 최고참이 되는 수동의 폭력에 이길 자신이 없었던 승영은 결국 ‘체제’에 굴복한다. 제대 후 태정에게 군대 이야기는 둘 중 하나다. 신나는 무용담 그리고 꺼내기 싫은 기억. 기억이라는 녀석은 가장 방어기제가 튼실한 놈이다. 주인이 고통 받지 않게 행복한 기억만 남겨두고 나쁜 기억은 숨기거나 왜곡한다. 그래서 태정은 자신을 찾아온 승영을 거부한다. ‘왜 다시 그때 이야기를 꺼내는 건데?’ 왜 그 자랑스럽고 입이 닳도록 자랑하는 군대 시절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는 걸까? 솔직히 말해보자. 군대가 좋은가? 또 가고 싶은가? 정말 잘못된 점이 없다고 여기는가? 그게 아니라면 왜 군대에 대한 문제 제기에는 그리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드는가?

한국 남성들이 가진 왜곡된 남성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집단이 군대다. 폭력, 철저한 계급문화, 비합리적인 행태에 대한 정당성 부여 등등 온갖 권위주의적인 것을 배우지만 그것을 ‘남성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강요한다. 이런 폭력에 물든 남성들은 사회에서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권위적인 아버지, 강압적인 남편, 비합리적인 상사, 폭력적인 아들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군대를 지울 수 없다. 2년 동안 강압적으로 주입된 주입식 교육은 물론 소중한 2년이라는 시간이 잘못된 시간이었다는 군대개혁의 입장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한국 남성들이 지닌 왜곡된 남성성. 이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은 20대 남성들 대부분이 경험하는 군대의 변화 밖에 없다. 

                                                                                                            

 

가족을 죽이는 난 기업입니다 <또 하나의 약속>

 

삼성은 명실상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이름이 높은 기업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 삼성. 한때 삼성은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했다. 이는 세련된 전자용품을 생산하는 삼성전자의 이미지를 부드럽게 바꿈과 동시에 전자제품이 우리 생활에 있어 얼마나 가까운지를 잘 보여주는 효과적인 광고였다. 하지만 삼성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는 없었다. 삼성 반도체 공장은 하청업체를 이용, 정직원이 아닌 하청업체 직원에게 생산을 맡겼고 이 생산 공장은 건강에 큰 이상을 일으킬 수 있는 환경이었다. 2012년 11월 기준 반올림 추정, 백혈병 발병자 151명, 사망자 58명이 삼성 반도체 공장 직원들에게서 나온 게 결코 우연일 수 없다.

평범한 택시기사 상구는 딸 윤미가 대기업 ‘삼성’에 취업했다는 사실에 너무나 기뻐한다. 변변찮은 벌이 때문에 학비도 제대로 못 보태주고 대학도 못 간 유미가 한국 최고의 기업에 취업이라니. 알고 보니 유미가 취업한 곳은 삼성 산하의 하청업체. 그녀는 그곳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고 2년 만에 백혈병에 걸려 돌아온다. 그래도 배우신 분들인데 그러지는 않겠지. 설마 사람을 죽음에 내몰리는 환경에 두지는 않았겠지. 그 설마가 진짜로 이뤄지는 순간 상구는 절망한다. 이런 ‘살인 기업’에 입사한걸 뭐 그리 좋다고 자랑하고 다녔을까, 왜 그들이 하는 말이 다 진짜일 거라고 믿었을까. 상구는 이에 항의하지만 삼성은 ‘이 돈 받고 꺼지슈’다. 공개된 반도체 공장은 이미 바꿔져 있고 언론을 이용, 상구를 비롯한 피해자 가족들이 삼성에게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기 위해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낸다.

                                                                                                         

 

여기에 믿었던 이웃들마저 상구 네를 대한민국 대표 기업에게서 돈을 뜯어내기 위한 파렴치한으로 바라본다. 이재용 삼성전자부회장은 국정농단이 주범 중 하나인 최순실의 딸 정유라에게 막대한 돈을 지원해주는 대신 경영권 승계에 있어 국가의 도움을 얻었다. IMF 당시 국민들은 나라를 살리기 위해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쳤으나 재벌 혹은 기업이 국가를 위해 한 헌신은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MB 정권 당시 ‘기업이 살면 국민이 산다’고 외쳤던 낙수효과는 전혀 없었다. 기업은 매번 높은 실적을 올렸으나 국민들의 지갑은 텅텅 비어갔다. 하지만 국민들은 박정희의 성공 신화에 빠져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파업, 노조,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이나 내부고발에 대해 반기를 든다. 기업을 망치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말이다.

이런 잘못된 인식 속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죽어갔다. 특히 삼성은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자신들의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린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법원 역시 이들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반복했다. 이런 잘못된 기업문화와 기업이 주는 돈을 날름날름 받아먹고 나 몰라라 하는 공무원 그리고 국회, 행정부, 법원의 배우신 분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국민들이 죽었다. 하지만 책임은 서로 떠넘기기 바쁘다. 여기에 판결은 솜방방이로 끝이 났다. ‘또 하나의 가족’을 내세웠던 삼성이라는 기업을 상대로 ‘또 하나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싸운 아버지의 사투에 우리가 공감하고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기업 위주의 국가 운영에 우리 역시 한 번쯤은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기업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기업을 이용 부를 축적하고 이를 자식들에게 성공적으로 승계하기 위해 악행을 반복하는 ‘기업의 재벌문화’가 문제인 것이다. 우리나라 재벌들은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악행을 서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잘못된 자본주의 문화가 정착되었고 보이지 않는 계급이 성립되었다. 잘못된 기업문화를 고치자는 것이지 기업을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 계급을 만들고 언론을 삼키며, 사법부와 국회, 정부도 모자라 대한민국 전체를 삼키는, 기업에 의한 ‘살인’이 정당화되는 국가를 없애자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다.

                                                                                                  

 

갑질? 어이가 없네 <베테랑>

 

국정농단 사태, 그 이후 자유한국당의 계속되는 꼬장, 그리고 언론의 물타기를 보면서 느낀 것이 있다. 적폐라는 놈들은 진짜 없애기가 힘들구나.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영화가 있다. 살이 터지고, 뼈가 부러지며, 목숨까지 위협받은 형사 서도철이 재벌 2세 조태오를 끝까지 체포하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영화 <베테랑>이다. 행동파 형사 서도철은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시위를 벌이다 병원에 입원, 혼수상태가 된 배기사를 폭행한 이가 조태오라는 것을 알고 그를 잡아넣기 위해 최선을 다하나 그때마다 위기에 처한다. 막대한 돈은 물론 이종격투기를 연마하며 신체적으로 강한 조태오는 단연 ‘최고의 적’이다. 내가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있게 본 부분은 그 유명한 ‘어이가 없네’라는 조태오의 명대사가 등장한 배기사와 조태오의 면담 장면이다.

앞서 조태오는 위독한 아버지로 인한 경영권 승계, 그리고 재산 문제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형과 누나를 상대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아 주주들로 하여금 어느 정도의 경영권과 재산배분에 있어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약물중독은 물론 난잡한 사생활을 일삼는 문제아다. 거기에 막내라 형, 누나에게 뒤질 수밖에 없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게 밀린 월급을 받지 못했다며 일인 시위를 하던 배기사다. 그가 배기사와 면담을 하는 장면은 재벌 2세가 가진 세상물정 모르는 순수함 그러기에 누구보다 악해질 수 있는 악랄함이 동시에 담겨 있다. 조태오는 배기사의 아들이 관심을 보이는 프라모델 자동차를 아이에게 선물한다. 이 장면은 참으로 따뜻하고 순진무구하다. ‘돈’을 중시하는 재벌이 자신의 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알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선물하는 것이다. 이런 따뜻한 재벌의 모습은 단 몇 초 만에 사라진다.

                                                                                       

 

배기사가 밀린 돈이 겨우 몇 백 만원이라 말했을 때, 조태오는 감당하기 힘든 분노를 느낀다. 그는 이 사건을 해결함으로 자신이 얼마나 유능하고 능력 있는 사람인지를 이사회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겨우 몇 만원? 이는 이사회에서 어필하지 못할 수준이 아니라 조롱감이 될 만한 액수다. 이 말이 끝나고 조태오는 그 유명한 ‘어이’에 대해 말한다. 

‘맷돌 손잡이가 뭔지 알아요? 어이라고 해요. 맷돌을 돌리다가 손잡이가 빠져 그럼 일을 못하죠? 그걸 어이가 없어 해야 할 일을 못한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내가 지금 그래. 어이가 없네?’

이 해야 할 일이 그에게는 이사회의 문제고 어이가 배기사다. 그는 배기사가 어이가 되어주길 바랐으나 그러질 못하자 심한 분노에 빠진다. 그리고 전소장을 시켜 배기사를 폭행, 이에 분노한 배기사가 다시 들어오자 악랄한 발길질로 그를 혼수상태에 빠뜨린다. 재벌들의 무서운 점은 그들의 분노, 그리고 이걸 푸는 방식이 지나치게 순수하다는 점이다. 조태오가 폭행당한 배기사에게 건넨 건 ‘돈’이다. 그리고 그에게 이런 사고방식을 주입시킨 건 조태오의 아버지다. 조회장은 일이 커지자 조태오를 보살피던 최상무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들어가라 말한다. 그리고 그 대가는 평생을 책임져 준다는 ‘돈’이다. 아버지에게 이런 모습을 보고 배운 조태오가 택하는 ‘지름길’ 역시 돈이다.

기업과 재벌들의 ‘갑질 문화’가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이 모든 문제를 돈으로 해결하려는 추태를 보인다는 점이다. SK 최태원 회장의 사촌동생 최철원은 본사 앞에서 해고 항의 1인 시위를 하던 유모씨를 잡아 ‘매질 한 대에 100만원’이라며 폭력을 행사했다. ‘돈이면 다 돼’ 라는 재벌들의 생각이 돈으로 쌓은 그들의 왕국을 만들었고 대놓고 계급을 유도하고 있다. 재벌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갑질’이라고 말하는 것조차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서민들이란 ‘어이’로도 쓸 수 없는 존재처럼 여겨질 테니 말이다.

                                                                                          

 

미안하지만 행복은 성적순이야 <명왕성>

 

영화 <더 킹>을 보면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이 조그마한 교실에서는 주먹 좀 쓴다는 놈들이 대장이지만 미래에 사회에 나가면 저 앞자리, 안경 낀 공부벌레들이 대장이 된다.’ 학창시절 급훈으로 ‘지금 잠을 참으면 김태희랑 결혼할 수 있다’가 내걸렸던 내 입장에서는 참으로 씁쓸한 대사였다. 1989년 개봉한 강우석 감독의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를 제외하면 학생들이 겪는 공부의 압박과 고통을 다룬 영화는 공포영화 밖에 없었다. 교육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 해결책은 뚜렷하게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0교시 폐지, 야간자율학습 자율화, 10시 이후 학원 수업 금지 등 다양한 정책들을 펼쳤으나 여전히 ‘사교육’ 그리고 ‘교육 열풍’은 잡히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교육 문제가 잡히지 않는 이유는 하나다. 바로 ‘입시제도’다. 수능이 문제고 수시가 문제다 라는 식의 형식의 문제가 아닌 그 본질이 잘못되었다는 소리다. 1등 대학인 서울대를 중심으로 대학들을 쭉 줄 세워 놓는 교육 문화. 더 높은 대학을 가야만 취업에 유리하고 신분역전을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교육이라 여기기에 이 열기는 꺼지지 않는다. 이런 교육열에 죽어나는 건 학생들이다. 서태지가 ‘교실이데아’를 외친지 23년, 대한민국 교실은 그때의 어둠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교사 출신의 신수원 감독은 약간은 과장되어 보이는 영화 <명왕성>을 통해 한국의 교실풍경을 꼬집는다. 상위권만 들어갈 수 있다는 스터디 그룹. 그 그룹의 리더격인 전교 1위 유진, 그리고 그 무리에 들어가 어떻게든 점수를 올리고 싶은 준. 불 꺼진 교실과는 달리 전교권을 모아둔 특별반의 꺼지지 않는 불빛을 바라보며 준은 자신의 미래가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준은 자신들끼리 비법을 주고받는 스터디 반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유진은 이곳 녀석들은 다 미친놈들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성적을 올리기 위해 입부를 희망하는 준에게 그들은 잔혹한 미션을 준다.

                                                                                                 

 

다들 한 번쯤 그런 친구를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데 악랄하게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는 녀석을 말이다. 만병의 근원인 스트레스는 어떤 방식으로든 풀려야 인간이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한다. 스트레스가 심하면 심할수록 풀기 위한 방식은 더욱 자극적일 수밖에 없다. 공부에 미친 아이들 중 몇몇은 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극단적인 ‘놀이’를 한다. 남을 괴롭히는 걸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의 경우 죄책감이 없다. 아니, 오히려 당당하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며 변명한다. 자신을 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 부모의 기대와 지나친 노력의 강요, 떨어지면 다시 올라갈 수 없다는 불안감이 학생들을 ‘미치게’ 만드는 것이다.

수능 날이면 시험이 끝나고 자살하는 학생들에 대한 소식이 종종 뉴스를 장식한다. 수능이 전부가 아닌데, 대학이 전부가 아닌데도 그 ‘한 번’의 실패가 인생 전체를 암흑으로 이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살인사건이 일어났지만 빨리 끝내달라고 말하는 교장, 경찰에 잡혀가면서도 ‘우리 내일 모의고사인데 망치면 책임질 거예요?’라고 말하는 학생들, 빠듯한 살림에 널 위해 투자한다고 강조하는 부모님. 이 영화가 보여주는 교육의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만든 서바이벌이다. 이 서바이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을 펼치는 학생들은 작품 속 잔혹한 ‘토끼몰이’처럼 몰이를 당한 ‘토끼들’이다.

잔인한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행복은 성적순이다. 더 똑똑한 놈이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대학에 간 놈이 더 좋은 정보와 교육을 받고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간 놈이 더 많은 돈과 시간을 번다. 교육 문제는 단순히 ‘교육구조’만을 바꿔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회가 지닌 수직의 구조, 그 자체를 수평으로 바꾸지 않고서야 이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누구나 품고 있을 그 이름, 제인 <꿈의 제인>

 

정확히 언제 본 기사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 기사는 가출한 혹은 집에 있는 걸 싫어하는 학생들이 모여 만든 팸에 대한 이야기였다. 팸이란 건 가출한 학생들이나 가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들이 경제력 있는 ‘아빠’ 혹은 ‘엄마’라 불리는 이들의 집에 머무르며 자기들끼리 규칙을 정해 지내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의미한다. 이 팸에서 자기들끼리 규칙을 정했는데 그 중 하나가 애인이 있는 사람을 좋아하면 반나절 동안 모두가 그 사람을 때리는 것이었다. 한 여학생이 그 규칙을 어겼고 모든 팸원들이 밤새 폭행을 했다. 그리고 그 애는 죽었다. ‘팸문화’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이지만 아직 이슈화가 되지 않은 문제다. 가출청소년들을 모아 성매매를 시키거나 장기밀매 등을 할 수 있는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 ‘피해자가 스스로 집을 나갔기에’ 그리고 그 부모가 ‘굳이 아이를 찾으려고 들지 않기 때문에’ 공권력의 손이 닿지 않고 있다. 이런 팸의 성행의 가장 큰 원인은 그 아이들 대부분이 부모가 없거나 혹은 부모에게 버림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꿈의 제인>은 아무도 없는 소현이라는 아이가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쓰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소현에게는 정호라는 오빠가 있었고 그 오빠는 소현을 모텔에 혼자 둔 채 떠나버렸다. 그 뒤 소현은 제인이라는 트랜스젠더의 팸에 들어간다. 하지만 제인이 죽고 혼자가 된 소현은 같이 팸에 있었던 사람들을 따라 병욱의 팸에 들어간다. 하지만 병욱은 제멋대로인 것은 물론 팸원들을 압박하고 지나치게 하나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규칙을 지키지 않은 지수에게 심한 보복을 가한다. 사람에겐 정말 슬픈 사실이 하나 있다. ‘성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나이가 되기 전까지 혼자 자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동물이 생후 몇 달이 지나면 부모의 품을 떠나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너무 오랜 시간을 부모의 보호 아래 지내야만 한다. 그래서 사람에게 가장 두려운 건 ‘혼자 남았다는’ 사실이다. 소현은 어떻게든 혼자 남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병욱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자신에게 그토록 잘해주었던 지수가 위험에 처해도 구해주지 않는다. 심지어 지수의 죽음을 이용해 새로운 팸에 들어가려고 한다. 

                                                                                                        

 

내가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팸문화’에 대한 비판보다는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을 만드는 사회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이 주제는 앞서 말한 주제들보다 훨씬 추상적이며 뚜렷한 해결책을 말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먼저 생각했던 것이 팸문화다. 팸문화를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량 청소년들 일부의 문화라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팸을 찾는 아이들은 소외된 아이들이다. 부모는 직장에 나가 없고, 학교라는 집단의 문화에는 끼지 못한 아이들이 팸을 찾는다. 팸의 엄마, 아빠들도 다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이런 아이들을 이해해 쉴 공간을 주고, 밥을 챙겨주는 것이 이들이다. 자치 규약을 만드는 팸도 있지만 그저 쉼터의 역할만 하는 팸도 있다. 영화에서 보여주는 팸문화는 잘못된 형태를 보이지만 팸이 지향하는 자체규율만큼 민주적인 문화도 없다. 이들은 자신들끼리의 규칙을 통해 따스함을 얻지 못하는 가정과 학교에서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취한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을 악용하는 ‘꿈을 뺏는 어른들’이다. 작품에서 지수는 성매매를 통해 번 돈으로 집을 얻어 시설에 있는 동생과 함께 살 꿈을 꾼다. 병욱이 정한 강압적인 규칙 때문에, 그리고 과한 복종적인 태도를 원하는 그의 성향 때문에 끔찍한 고통을 겪고 결국 죽고 만다. 영화 <두 남자>의 팸문화 역시 마찬가지다. 재벌2세 성훈은 아이들을 모아 수족처럼 부리며 그들을 폭행한다. 심지어 아이 중 한 명을 죽이기도 한다. 소현은 그저 살고 싶은데,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 팸을 전전하는 것인데 꿈을 뺏는 어른들 때문에 자기 자신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주변인’으로 살아간다.

                                                                                             

 

이런 소현에게 ‘꿈’이 되어주는 인물이 제인이다. 제인은 트렌스젠더다. 거식증에 걸린 그녀는 하루하루 죽어간다. 하지만 이런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아이들에게 꿈이 되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제인이 무대에서 노래하는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한다. 절망이 아닌 관객들에게 기쁨을 주는 노래로 말이다. 누구보다 아프지만 아픈 아이들을 껴안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제인이다. 이 작품에서 제인은 소외되고 고독한 인간을 위한 조언을 내뱉는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 두 가지 있다. 그는 다른 팸과 달리 아이들을 일시키지 않는 팸문화에 대해 물어보는 소현에게 이리 답한다. ‘어차피 일은 나이 들면 실컷 하잖니. 죽을 때까지 하는 게 일이야’ 팸과 케잌을 나눠먹는데 케잌이 세 조각 남자 그는 이리 말한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잌이 3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다시 한 번 제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녀는 트렌스젠더고 혼자이다. 선술집에 나가 노래를 부르는 일을 한다. 누구보다 사랑받기 힘들고 사랑받을 수 없는 인물이 제인이다. 즉, 제인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을 수 없다. 받은 게 없는데 줄 사랑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에게 사랑을 준다. 책임감과 행복한 미래라는 명목으로 일을 시키기 보다는 꿈을 꾸게 하며, 경쟁과 이기는 삶을 가르치지 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법을 강조하며 인간된 도리를 말한다. 그래, 한 사회가 어두운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서는 ‘진짜 어른’이 필요하다. 사랑을 줄 수 있고, 꿈을 꾸게 할 수 있으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나와 너가 아닌 우리를 말할 수 있는 진짜 어른이 말이다. 작가 허지웅은 그의 책 <나의 친애하는 적>을 통해 ‘진짜 어른’에 대한 갈증을 말하고 있다. 진짜 어른을 만나지 못한 자신과 진짜 어른이 되고 싶은 자신 사이에서 그는 고민한다. 

사랑을 받지 못했기에 줄 수 없고, 수직의 삶을 경험했기에 따를 수밖에 없고, 경쟁 속에서 이겼기에 그 속에 들어가라 말하는 사람은 진짜 어른이 아니다. 그런 어른들은 사람들을 더욱 소외되고 고독하게 만들 뿐이다. ‘내가 힘들게 사니(혹은 살아왔으니) 너도 힘들어라’가 아닌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꿈꾸어라 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 만약 허지웅이 20대 시절 그토록 진짜 어른이라 믿었던 사장이 사기꾼이 아니었다면, 그의 아버지가 회사에서 나오는 대학등록금을 주고 더 높은 꿈을 꾸라고 말했다면 그는 진짜 어른을 갈망하지 않고 그 자신 역시 진짜 어른이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마음속에 제인을 품는, 누구보다 외롭고 힘들지만 사랑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를 품고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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