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리뷰] <빅토리아 & 압둘> - 민족이냐 개인이냐
[L리뷰] <빅토리아 & 압둘> - 민족이냐 개인이냐
  • 김준모 기자
  • 승인 2018.01.13 01: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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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당시 대영제국의 여왕 빅토리아와 인도인 청년 압둘의 우정을 다룬 영화

[루나글로벌스타] 강제규 감독의 야심작 <마이웨이>는 예상치 못한 흥행실패를 겪었다. 주연배우 오다기리 죠의 기행이나 거대한 블록버스터를 표방했으나 그 실속이 약했다는 점도 이유일 수 있으나 이 작품의 내용인 한국인과 일본인의 우정이 논란으로 떠올랐다. 어찌 2차 대전, 우리에겐 일제강점기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 ‘적과의 우정’을 이야기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 이유였다. 사람은 태어난 순간부터 바꿀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부모고 두 번째는 인종이며 세 번째는 민족이다. 민족은 같은 생활공간에서 같은 문화를 향유한다. 같은 역사를 간직하며 그 역사로 인해 웃을 때도 있지만 울거나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라도 그 배경이, 그리고 인종이 민족의 상황과 맞물린다면 그건 ‘민족 전체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해가지지 않는 나라’로 불렸던 시대의 영국, 즉 대영제국의 여왕 빅토리아와 식민지 인도의 한 서기관의 우정을 다룬 <빅토리아 & 압둘>은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국인과 아일랜드인의 사랑을 다룬 <로즈>, 마케도니아인과 알바니아인의 우정을 그린 <비포 더 레인> 등등 금지된 관계를 다룬 작품들은 이전에도 있어 왔다. 허나 그 대상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관계들을 모델로 해왔다. <빅토리아 & 압둘>은 제국주의의 열망을 펼친 영국의 수장과 그 피해를 입고 있는 인도인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즉, 앞선 작품들은 ‘우리가 서로 적이지만 이 사람이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건 아니지 않느냐’라는 변명이 가능하지만 이 작품은 그게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에게 피해를 끼친 나라의 수장과의 우정이라. 이 얼마나 기묘한 이야기인가.

빅토리아 여왕과 서기관 압둘의 우정은 참으로 눈부시다.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5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압둘은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말이 여왕이지 왕실의 엄격한 법도와 이기적인 자식들 속에서 마음 속 대화 하나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빅토리아는 압둘을 만나 마음의 편안함을 느낀다. 행사가 끝나는 대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압둘은 왕실에 잡힌 건 물론 가족까지 데려와 영국에서 살게 된다. 왜 빅토리아가 한낱 인도의 서민인 압둘에게 빠졌는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녀의 성장과정을 봐야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켄트 공작부인은 딸이 왕위에 즉위하면 섭정공이 되려고 했고 이를 위해 비서 콘로이와 함께 딸에게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그녀의 곁에는 항상 시중이 붙었으며 행동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했다. 매일 엄청난 양의 공부를 시켰고 사람을 사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이런 억압되고 폐쇄된 환경 속에서 빅토리아는 고집스럽게 자랐다. 그녀는 18살의 나이에 왕에 올랐다. 성인의 나이로 즉위한 그녀에게 섭정공은 필요 없었고, 마음에 품었던 어머니와 콘로이에 대한 분노를 여지없이 표출했다. 콘로이는 내쫓고 어머니는 지방에 유배시켜 버렸다.

18살의 어린 나이에 국가의 원수(元首)가 된 그녀는 21살에 앨버트 공과 가정을 꾸리지만 너무나 사랑했던 앨버트가 죽자 극심한 우울증에 빠진다. 특히 앨버트가 아들 버티를 훈계하기 위해 나섰다 얻은 병으로 죽었기에 아들을 원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녀에게는 마땅한 친구도, 인생을 함께 꾸려나갈 조력자도 없었다. 81세의 나이든 그녀 앞에 나타난 압둘은 영국의 지식과 법도와는 다른 생각과 사상으로 여왕을 끌어당겼고 그녀의 ‘스승’이 되기에 이른다. 빅토리아의 성장배경을 보자면 그녀가 ‘왜’ 압둘을 자신의 친구로 받아들이고 평생을 함께할 친구로 여겼는지를 알 수 있다. 헌데 이 느낌표가 압둘의 입장에서 보자면 물음표로 바뀐다. 여왕에게는 압둘이 필요했다. 헌데 압둘은 대체 왜 왕실 식구들의 따가운 눈총과 차별을 견디면서까지 여왕의 곁을 지켰던 걸까? 

예를 들어보자. 일본에서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배경은 일제강점기. 한 한국인 청년이 일왕의 생일파티에 참석한다. 일왕 히로히토는 청년의 생기와 색다른 식견에 반하고 그를 곁에 두려고 한다. 말리는 왕실 식구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청년을 곁에 두는 일왕. 패망 후 일왕은 항복 선언을 하고 라디오로 이 소식을 들으며 청년은 오열한다. 이런 영화가 나왔다면 우리는 화를 냈을 것이다. ‘왜 가해자인 일본이 피해자인 한국에게 우정을 논하느냐’ 라면서 말이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가해국인 영국이 피해국인 인도에게 우정을 논하고 있다. 헌데 신기한 건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점이다. 작가 바슈가 카레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던 중 빅토리아 여왕이 카레를 좋아했다는 점을 알게 되고 그녀의 자료들을 조사하던 중 압둘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된 것이다. 압둘의 친척들을 통해 압둘의 일기를 손에 넣은 바슈는 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적국 수장(首長)과 우정을 쌓은 압둘은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이었던 걸까? 

빅토리아와 압둘. 둘만의 관계로 생각했을 때 그들은 서로를 존중하는 친구였을 것이다. 빅토리아는 몇 번의 거짓이 될 수 있는 행동들을 눈감아줬고 압둘은 보복이 올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여왕의 곁을 지켰다. 하지만 민족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과연 이 우정이 옳은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민족을 따르지 않는 모든 우정이 허용이 된다면 나라가 위험한 순간에 우정을 이유로 배반하는 행위가 성행할지 모른다. 친구가 잘못을 하면 따끔하게 혼내고 하지 못하게 해야 되는데 ‘나랑 얘는 친구니까’ 하는 이유로 잘못을 감싸주고 상대만을 위해주는 행위가 민족 대 민족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도 일본의 협박이나 회유에 굴복, 친일을 한 사람도 있지만 ‘조선인은 열등하고 일본인은 똑똑하다’는 이유로 친일에 선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친일을 단순한 ‘우정’으로 포장한다면 민족에 대한 배신, 더 나아가 국가에 대한 배신은 너무나 가벼운 ‘잘못’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이런 민족을 근거로 개인의 감정을 억압하는 생각 역시 문제가 있다. 민족 대 민족의 문제는 그 당사자가 개인과 개인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민족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바꿀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적이 정해지고 나에게 직접적으로 끼친 피해가 없음에도 미워하는 감정을 강제로 주입당한다면 이 역시 또 다른 아픔이라 할 수 있다. 개인의 감정은 개인의 것이다. 우정이라는 존중받아야 될 감정을 선택할 수 없는 문제로 인해 지우라 강요당한다면 억압이요 탄압이라 할 수 있다. 민족이 먼저냐, 개인이 우선이냐. 영국 여왕과 인도 청년의 기이한 우정처럼 참으로 답을 내리기 오묘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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